유주상 기자
승인
2020.03.02 14:01 | 최종 수정 2020.03.0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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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사는 천문대에서 직접 관측을 하시는 전문가가 들려주는 관측 대상 이야기 입니다.
화천조경철천문대 대장님의 생생한 관측 이야기 입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쁜 일상에 잠시 잊고 사는 것이 있습니다.
쉼표가 필요할 때, 천문대로 여행을 떠나보세요.
천문대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봄은 은하의 계절이다.
아름답고 특이한 모습의 은하들은 깊고 고요한 우주의 심연으로 이끈다.
우주에서 가장 거대하고 신비한 존재인 은하.
우리는 천문대 여행에서 은하를 만날 수 있을까?
아쉽게도 우리의 눈은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천문대에서는 매일 밤 관람객을 위한 관측목록을 구성한다.
달, 행성, 성단. 그 날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대상이 선정된다.
그러나 ‘안드로메다은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은하들은 이 목록에서 제외된다.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만나는 우주의 이미지들은 카메라로 오랜 시간동안 빛을 모은 결과물이다.
아무리 커다란 망원경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맨눈으로 들여다보는 천체의 모습은 아주 어둡고 매우 흐릿하다. 그렇게 외면 받은 천체들은 누군가를 오롯이 기다리며 잠든다.
관람객이 모두 떠나고 난 뒤 천문대에 남겨진 별지기는 깊은 밤 홀로 여행을 떠난다.
봄은 별지기의 짝사랑이 시작되는 그리움의 계절이다.
1828년 봄바람이 불어오던 3월의 어느 봄 날.
슈베르트는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캐롤라인 에스테르하치 (Karoline Esterházy)를 떠올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함께 호흡하며 하나의 피아노를 연주해야하는 연탄곡.
슈베르트의 환상곡은 짝사랑하는 별지기를 위한 곡이다.
모두가 떠난 밤, 혼자 남은 관측실에 은은하게 피아노 선율이 퍼진다.
가끔 그대와 함께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흑과 백의 건반위로 너의 손과 나의 손이 스치고 온 몸의 신경은 전율한다.
슈베르트는 그리움을 가득 안고 <네 손을 위한 환상곡>를 완성하였다.
별지기들은 저마다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
나의 짝사랑은 ‘하트’의 모습으로 우주 저 편에서 기다리는 한 쌍의 은하다.
별지기는 4,500만 광년을 건너 우주를 헤맨다.
매일 밤마다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망원경을 들여다봐도 보이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다.
황사가 밀려와 뿌옇게 변해버린 하늘에서 청명한 날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달빛이 없고, 수증기와 미세먼지가 없고, 대기가 안정된 날이 며칠이나 될까.
기다림은 그리움이 된다. 혼자서 환상곡을 듣는 날이 많아진다.
그럼에도 그 길을 살피고 기다린다. 어쩌면 오늘은 만날 수 있을까.
하트를 닮은 아름다운 천체. NGC 4038, NGC 4039
1785년 윌리엄 허셜 (William Herschel 1738~1822)은 까마귀자리(Corvus)에서 한 쌍의 희미한 은하를 발견하였다. 허셜은 실체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작고 희뿌옇게 보이는 천체를 보았을 뿐이지만 우리는 천체사진기술의 발전으로 그 모습을 편하게 컴퓨터 모니터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천문학자들은 곤충의 더듬이(Antennae)를 닮은 모습에 착안하여 ‘안테나은하’라 부른다.
하지만 서로를 감싸 안은 이 한 쌍의 은하에겐 ‘하트은하’란 이름이 더 어울린다.
하트를 닮은 이 아름다운 천체는 중력과 시간이 빚어낸 결과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독립적인 은하가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드넓은 우주에서 하나가 된다.
‘하트은하’의 모습은 12억년에 걸쳐 진행 중인 은하와 은하가 충돌하는 대사건이다.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존재들이 펼치는 러브스토리를 우리가 만나는 것이다.
100억 년 전 우주에서는 은하와 은하의 결합이 매우 빈번하게 발생했고 현재는 1% 정도의 은하가 충돌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하트은하’는 각각의 독립된 2개의 은하였다.
큰개자리의 한 쌍의 은하들처럼 그저 근처에 있을 뿐이었다.
12억 년 전 아주 우연히 변화가 찾아왔다.
어느 순간에 상대의 중력장 안으로 들어갔고 다가서기 시작했다.
‘우연’은 곧 ‘필연’이 되었다.
서로를 인식했고 서로에게 이끌렸다.
멈춰있던 시간이 고요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두 은하가 서로 충돌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1000억년의 수명을 갖는 은하에게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9억 년 전.
서로를 향해 뻗은 팔이 닿을 만큼 두 은하는 가까이 근접했다.
두 은하는 강한 중력 작용으로 인해 서로 손을 잡은 듯 연결되고 별과 가스, 우주 먼지로 이루어진 내부의 물질들을 교환했다. 두 명의 댄서가 서로 손을 맞잡고 추는 왈츠처럼 두 은하는 서로를 끌어안는다.
은하와 은하의 결합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를 향했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교차하며 어긋나기도 한다.
‘하트’ 은하는 6억 년 전 최초의 어긋남을 경험했을 것이다.
서로의 주위를 멤돌고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은하의 본래 모습은 점차 깨어지고 특이한 형태로 모습이 변한다.
복잡한 과정 속에서 느리고 조용하게 점차 하나의 은하로 결합한다.
머리털자리의 NGC 4676 은하는 그렇게 ‘밀당’하는 대표적인 은하이다.
3억 년 전 이윽고 두 은하는 커다란 하트의 모습을 띄고 결합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더 이상 어긋나는 일 없이 커다란 하나의 은하로 태어나며 그들의 드라마는 끝이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불과 12개의 단어로 이 드라마를 요약한다.
“시공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물질에 말하고, 물질은 어떻게 굽는지 시공에 전한다.”
(Space-time tells matter how to move, matter tells space-time how to curve)
이렇게 우리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가장 거대한 사건을 경험했다.
그리고 우리도 인생에서 펼쳐지는 가장 위대한 사건도 경험한다.
결국 은하와 은하의 충돌과 결합은 ‘인간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누군가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그 때, 그 장소에서, 그렇게 만났다는 것은 우연이다.
사랑은 찰나의 시간에 불꽃처럼 일어나 서로의 인력에 끌리게 한다.
끝없이 얽혀있는 ‘필연’과 ‘우연’의 실타래에서 우리는 ‘운명’이란 단어를 떠올리기도 한다.
‘운명’이란 과학적 사고에서 기인하는 단어가 아니다.
이제 과학은 아주 작은 양자단위까지 내려가 확률로서 모든 원인과 결과를 설명한다.
사랑의 원인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스치고 끌리며, 떨림과 설렘이 찾아오고 모든 신경이 들뜨는 그 순간을
“나의 감각기관이 물리적 자극을 전기적 신호로 뇌에 전달하면 페로몬, 도파민,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 등의 화학물질 분비로 인해 작용하는 생화학적 현상”
이라고 말하지는 말자. 운명처럼 첫 눈에 반했다고 말하자.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을 부르는 계절.
올 봄에는 짝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슈베르트가 그랬고, 나도 그랬고, 당신도 그랬다.
봄이 왔다.
기사 : 유주상 대장 (화천조경철천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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