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특집] 윤동주가 바라본 별 헤는 밤

김정현 기자 승인 2019.08.14 13:24 | 최종 수정 2019.10.24 16:18 의견 0

지난 7월 중순 스페이스타임즈의 8월 기사를 준비하면서 광복절 특집기사로 윤동주가 바라본 밤하늘이라는 주제를 받아 들었습니다. 당시에도 한일관계는 어려웠지만 점차 꼬여가는 최근의 시국은 이 주제를 예상보다 더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천문학 역시 일본과 무관할 수 없고 특히나 광학기기의 경우 일본의 특수유리 소재산업에서부터 시작하여 카메라, 망원경 등 그들이 미치는 영향은 대체가 불가능한 상품이 상당할 정도로 매우 큽니다.

현대 산업의 경우 기술이 없어서 못 만든다기 보다는 인건비 같은 외적 요인으로 경쟁력이 떨어져서 하지 않거나, 다른 것을 더 잘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더 집중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므로 국가적인 분업이 나타납니다. 우리나라는 80년대 쌍안경을 많이 만들어서 일본을 통해 해외로 수출한 역사가 있긴 하나 중국의 부상으로 현재는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 정도입니다. 들고 다닐 수 있는 소형 망원경의 경우는 더 심해서 현재는 몇몇 천체추적장치(적도의)가 한국에서 제조되고 있을 뿐 대부분의 장치들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망원경을 만들 기술이 없는 게 아니라 망원경보다 다른 것을 더 잘 만들기 때문으로 이해해야합니다. 예를 들어 세계최대의 광학기업인 독일 Carl Zeiss는 더 이상 망원경을 만들지 않는데, 약 10년 전 Zeiss 아시아 마켓 대표이사와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해본 바, 잠망경 같은 군사적인 고부가가치 제품이나 우주망원경을 제작하는 것이 낫기 때문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비슷한 이유랄까 한국은 소형 망원경을 만들지 않는 나라가 됐고 일본 망원경을 사용하는게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범대학교에서 지구과학 교사를 양성할 때 사용하는 망원경은 대부분이 일제 망원경인 관계로, 그 망원경으로 교육받은 선생님들은 자연스럽게 일본 망원경을 구매하거나 사용하기 때문에 중고등학교에는 Vixen이라는 회사의 제품들이 상당히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서는 중국 망원경으로 변화하고 있는 추세인데, 중국제가 좋아진 이유도 있긴 하지만 학교의 예산이 넉넉하지 못해서 많이 선택된다고 봐야합니다. 한국의 영재학교나 명문학교, 교육청, 비교적 예산이 넉넉한 국공립 과학관의 경우 고급형 망원경은 일본 Takahashi라는 회사의 제품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페이스타임즈의 모기업인 주식회사 에스엘랩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일본 망원경을 다른 제품으로 공급하거나 사양을 바꾸는 자체적인 캠페인을 해왔으나, 엔드유저가 선택한 물건을 바꾼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건강했던 청년 윤동주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대체혈액 실험으로 생리식염수 대신 해수를 주사로 맞는 ‘혈장대리식염수’ 개발이라는 생체실험으로(반론이 있긴 합니다만)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과 이별했습니다. 6개월이 지나 원폭에 의한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는 얼떨결에 광복을 맞이했고, 75년이 다 되가는 지금까지 별 생각없이 그들의 물건을 사용해왔으며 대한민국의 물건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면서도 사실은 일본의 배도 불리고 있었다는 것을 올해 2019년에 뼈저리게 알게 되었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오래전부터 일본물건을 가급적으로 안 쓰고 살아왔으나 자신들이 우리의 목줄을 잡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들의 작태에 너무 화가 납니다. 다시금 광기와 이기주의로 이성이 결여되어 말도 안되는 짓을 벌였던 과거로 돌아간 듯한 주변국가의 리더들도 그렇고, 그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은 마치 주기를 갖고 돌아오는 파동처럼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듯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망원경을 도구로 삼아서 천문학과 살아와서일까, 가슴을 떨리게 하는 것 들에서 많이 멀어진 느낌이 들고는 합니다.
오랜만에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다시 되뇌어볼까 했지만 부끄럽게도 생각했던 것 보다 머리속에서 너무 많이 지워져 있었습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어머니, 어머니’, 이 글귀만이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별과 추억, 사랑, 쓸쓸함, 그리고 어머니를 이어보니 자연스럽게 가을 하늘이 떠오르긴 했습니다. 가을 밤하늘이 깊어지는 시간에 홀로 서 있어보면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곤 합니다. 별헤는 밤을 다시 읽어 보기 전, 몇 해 전 개봉한 영화 “동주”를 다시 보았습니다. 지금의 시대가 시대인지라 보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두 번 정도 나왔던 밤하늘 장면을 통해 영화를 만든 사람이 나름 세심히 고증한 것을 느꼈습니다. (잘못된 것을 찾긴 했는데, 그냥 넘어가도 아무 문제 없을 듯 합니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에 태어나 1945년 광복이 된 그 해 사망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시인들이 일제에 의해 변절을 했지만, 윤동주는 소수의 저항 시인이었기에 우리가 어릴 적부터 그렇게 국어시간에 그분의 시를 배우곤 했을 것입니다. 일제의 폭정이 점차 심해지던, 패망을 목전에 두고 있던 시기였기에 생전에 시집을 내지 못했습니다만, 그분의 시는 주변 지인들 덕분에 출판되어 우리가 지금처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시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별 헤는 밤’에서 별이라는 부분만을 다뤄볼까 합니다.

[사진 : 오리온자리가 빛나는 밤 (영화 동주 중 한 장면)]
[사진 : 오리온자리가 빛나는 밤 (영화 동주 중 한 장면)]

윤동주 시인은 현재 연변 조선족 자치주인 간도에서 태어났습니다. 1899년 김양연 목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동쪽(조선)을 밝힌다’라는 뜻의 명동촌을 세우고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은 그곳이었습니다.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이며 고종이 헤이그 밀사로 임명한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이 학교를 세운 곳이고, 그를 사상적으로 사사한 분이 바로 안중근 의사였으며 거사 전 사격훈련을 하던 곳입니다. 특히 그 지역은 사상적으로 개신교 신자가 많은 곳으로 윤동주 시인의 외삼촌이 목사였고 문익환 목사도 바로 이곳에서 윤동주 시인과 함께 자랐습니다.

[평양 숭실중학교 시절의 윤동주(뒷줄 맨 오른쪽), 그 옆이 문익환 목사]
[평양 숭실중학교 시절의 윤동주(뒷줄 맨 오른쪽), 그 옆이 문익환 목사]

간도에서 태어나 별을 보며 지냈을 유년시절을 거쳐 18세였던 1935년 평양의 5년제 학교인 숭실중에 입학했으나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자퇴를 합니다. 이후 고향의 학교로 돌아왔지만 그 역시 일본에게 매각된 학교였다고 합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과로 진학 후 졸업을 합니다. ‘별 헤는 밤’은 바로 이 시기에 쓰여진 시로 원문에 9연의 끝에 1941년 11월 5일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달 20일,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불멸의 구절이 담긴 바로 그 서시가 쓰여집니다.

[윤동주 시비와 연세대학교 핀슨관 (credit : 서울문화재단, 이연경박사)]
[윤동주 시비와 연세대학교 핀슨관 (credit : 서울문화재단, 이연경박사)]
[윤동주 시인이 머물던 다락방 (credit : 서울문화재단, 이연경박사)]
[윤동주 시인이 머물던 다락방 (credit : 서울문화재단, 이연경박사)]

핀슨홀은 연세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당시 약 5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남학생 기숙사였다고 합니다. 2층 같지만 사진에서 보이듯 다락층이 있어서 실제로는 3층이었다고 합니다. 그 창이 있던 방이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입학 후 2년간 시인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시를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게 해준 두 학년 아래의 정병욱을 만나게 됩니다. 
이 건물은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동-서 방향을 바라보는 건물이므로 아마도 시인은 뜨거나 지는 별 또는 달을 바라보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아래 글은 “달을 쏘다”라는 1939년 1월 조선일보에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입니다. 시인이 쓴 산문이지만 달에 대한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전략) “나의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슬픈 선창(船艙)이 되는 것이다.
(중략)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소리가 날 듯 하다.
(중략)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자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후략)

[우리가 윤동주의 시를 읽을 수 있게 해준 정병욱 교수와 윤동주 (출처 : 연세대학교윤동주기념사업회)]
[우리가 윤동주의 시를 읽을 수 있게 해준 정병욱 교수와 윤동주 (출처 : 연세대학교윤동주기념사업회)]

일본의 수탈은 심해지고 기숙사에서는 제대로 된 식사가 불가능해지면서 시인과 정병욱은 1941년 봄 인왕산 자락의 누상동에서 한달간 하숙을 했다가 다시 바로 옆 누상동 9번지로 옮기게 되는데 그 집은 항일작가이자 당시에 유명했던 김송이라는 소설가가 운영한 하숙집이었다고 합니다. (이 당시의 이야기는 정병욱 교수의 “잊지못할 윤동주”라는 산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한옥집은 헐리고 다른 집이 들어섰지만 하지만 그 골목길, 인왕산을 오르던 산책로, 복원된 수성동 계곡은 시인이 걸었을 그대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출처 : 종로구 블로그 기자단)]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출처 : 종로구 블로그 기자단)]
윤동주하숙집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길 57
윤동주하숙집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길 57
[북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인왕산이 보이는 윤동주가 걸었을 그 골목 (출처 : 한국관광공사)]
[북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인왕산이 보이는 윤동주가 걸었을 그 골목 (출처 : 한국관광공사)]

2009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는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협조를 받아 시인이 시의 영감을 많이 받았을 것이고 별을 봤을 것이라 생각되는 장소인 자하문고개와 청운공원 일대의 높은 언덕을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조성했습니다. “ 헤는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듯합니다.’ 부분을 통해 시인은 다른 계절에도 별을 많이 봤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다른 계절보다 유독 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아야 있는 부분이지요. 관측을 해본 분이라면 알겠지만 가을철의 별은 상당히 허전합니다. 실제로 가을철은 지구에서 바라보는 방향 별이 별로 없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부암동에서 가까운 곳으로 산책하기 매우 좋은 곳입니다. 150m 곁에 윤동주문학관이 있으니 시인에게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한번 방문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서울은 이상 별을 제대로 있는 곳이 아니기에 이제는 불가능하지만, 당시에는 여름철 은하수를 있는 높은 장소 하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시인은 간도에서도 별을 보며 살았을 테니 아마 이글을 읽는 누구보다도 많은 별을 눈에 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같은 가을학기가 시작되면서 일제의 감시로 인해 시인과 정병욱은 북아현동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이곳은 8 정도가 생활하는 꽤나 전문적인 하숙집이었다고 합니다. 후일담으로 정병욱은 시인이 북아현동에서 지낸 이유가 이화여전의 여학생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만, 이곳에서 지내던 시기가 바로 헤는 서시 쓰여진 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곳은 누상동과 달리 모두 재개발로 모든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시인이 봤을 인왕산자락에서 밤하늘과 달리 쓸쓸했던 밤하늘을 간직했던 아현동은 이제 속에서만 살아있습니다.

스승이신 노교수님 분은 1950년대 후반 신촌에서 봤던 밤하늘이 지금도 꿈에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당시 아현동도 별이 보였을 것은 사실입니다. 아래, 영화동주 나왔던 밤하늘은 실제 보였던 밤하늘보다 훨씬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시인이 바라본 밤하늘은 지금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바라보는 바로 그 밤하늘이라는 사실입니다. 창작일이 시에 기입되어있는 덕분에 "별 헤는 밤"은 지금은 중국이 되어버린 간도도, 동경도 아닌 연세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므로 서울에서 바라본 밤하늘을 보며 윤동주 시인의 마음에 동화되어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신 분이 있을까 하여 첨언하는데, “ 헤는 읽으면서 어릴 적부터 궁금했던 것은, 시의 마지막 연이었습니다. 다른 어투, 생경한 느낌이 마치 시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첨언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저도 기사를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시를 읽어 정병욱은 시의 끝이 허하다고 평하자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덧붙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9연의 끝에 날짜가 적혀 있던 것이라 합니다. 가지 설을 읽어봤는데, 저는 마지막 연이 시인의 주석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복선이면서도 당당히 살겠다는 의지로 느껴집니다.

[영화 동주의 밤하늘 (출처 : 영화 동주)]
[영화 동주의 밤하늘 (출처 : 영화 동주)]

전쟁으로 인한 학제단축으로 윤동주 시인은 3개월 빠른 1941년 12월 27일 졸업을 합니다. 그 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모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시가 통과되지 못할 것이라는 스승인 이양하 교수의 권고로 기약없이 미루게 합니다. 대신 시인은 일본 릿쿄대학에 입학하기 전 이양하 교수와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을 증정했다고 합니다. 이후 정병욱은 학도병으로 끌려가면서 시인의 육필 원고를 전남 광양의 본가에 맡기면서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해달라’고 모친에게 당부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아름다운 시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정지용 시인의 영향으로 윤동주 시인은 일본으로 유학을 간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에서는 정지용 시인의 역할을 문성근씨가 맡고 있는데, 윤동주 시인과 함께 유년을 보냈던 아버지 문익환 목사 때문일까요? 영화를 보면서 내내 정지용 시인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은 그 초기작부터 정지용 시인의 영향을 너무 강하게 받았습니다. 만약 윤동주 시인에게 일본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다 어땠을까요? “참회록”, “쉽게 쓰여진 시”를 포기하고서라도천수를 누리며 엄청난 시를 남긴 시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일본으로 유학을 간 시인은 북에서 점점 남으로 내려가면서 별을 봤을 것입니다. 시인이 일본에 있으면서 봤을 밤하늘은 그리움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42년 릿쿄 대학에 입학 후 패망을 앞두고 뒤숭숭해진 도쿄를 뒤로하고 교토의 도시샤 대학으로 편입을 했지만 43년 체포되어 2년형을 받지만 1945년 2월 뇌일혈(일제의 생체실험으로 인한 세균감염이 원인으로 추정되며 해수로 인해 감염 된 혈액이 뇌로 빠져나올 때의 증상이 이와 같다고 합니다.)로 사망합니다.

[윤동주 생애 마지막 사진 (출처 : SBS)]
[윤동주 생애 마지막 사진 (출처 : SBS)]

일제는 시인의 죽음조차 제때 알리지 않았고 원래 건강했기에 그랬는지 규슈제국대학에서 시신마저 실험용으로 사용하려 했다 합니다. 만약 시신을 수습한 시인의 아버지와 당숙이 하루만 늦었더라면 우리는 시인의 참회록보다 더 큰 참회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시한번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놓쳤던 것일까요?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너무 쉽게 잊었습니다. 시인이 태어난 1917년 12월 30일은 경술국치로부터 이미 7년여가 흐른 때입니다. 그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나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빼앗긴 나라였는데 다시 독립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갖고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존경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씩 자문하지만 변절한 사람들이 당연했을 그 시절에 과연 내가 그들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 절대 자신이 없습니다.

태풍 덕분에 오늘은 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맑은 날 별을 보면서,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시인의 순수한 마음을 다시한번 느끼고 싶은 밤입니다. “별 헤는 밤”을 아래 올리며 부끄러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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