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이도:*
들어가는 말
교과서에 나오는 모든 과학자들은 너무나 훌륭하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뉴턴에 대해서는 "어떻게 지난날의 그 모든 과학 식들을 다 정리했을까?" 하고 생각했고, 티코 브라헤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장 위대한 발견을 이끈 과학자라고 생각했으며, 케플러도 역시, 티코의 제자로서 어떻게 그 세가지 법칙을 만들었을까,, 하고 늘 위대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도 하고,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 있는 과학자들 중에 티코 브라헤가 가장 괴짜였지요. 만화에서 보는 실험복을 입고 늘 폭발사고를 일으키는 모습보다 더 황당하고, 괴짜 같은 면을 보이는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수줍음이 많아 논문 발표하기를 꺼려한 과학자도 있습니다.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과학은 꾸준히 발전함을 알았습니다. 한 과학자가 너무나 실력이 대단해서 하루 아침에 뭔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연구한 과학자들의 경험에 자신의 생각을 보태면서 계속 발전해가는 것이 과학사가 아닐까요. 아리스토텔레스 편에 보면, 과학자 계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계보는 앞서간 과학자를 계승한 것뿐만 아니라, 반대 입장을 편 경우도 많습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환이 가장 극적인 예입니다. 그렇게 과학은 반전과 반전의 계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과학자는 혼자서 나오는 경우가 드뭅니다. 스승과 제자의 경우가 가장 많겠지요. 여기서는 브라헤와 케플러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이좋은 스승과 제자라기보다는 서로에게서 이익을 취했던 사제관계였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라이벌이나 협력자 관계입니다. 핼리 편에 보면, 핼리와 뉴턴은 협력관계이고, 플람스티드와 카시니는 라이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쌍벽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뉴턴, 핼리, 플램스티드, 카시니, 뢰머가 다 같은 시대 사람인 것을 보면, 서로의 도움과 경쟁관계가 과학발전에 어떤 역할을 했을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중에 나온 많은 책들 중에 이향순님의 "우주의 신비를 캔 영웅들"이 가장 내용이 좋았습니다. 단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쓴 책인 점이 아쉬웠지만요. 국내 잡지나 기타 다른 곳에 수록되는 과학자 이야기들은 거의 다 이향순님 책을 참고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내용이 완전 동일한 경우가 흔히 발견되기도 합니다. --; 과학자들의 업적을 다시 되돌아보는 일은 누군가 꼭 해야 하는 일인데, 국내에서는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과학자들의 이론만 나왔지, 그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연구를 몇 년 동안이나(꽤 오랜 시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지요) 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은 머리 좋은 사람만 하는 것 또는 과학은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된다면, 과학자들의 업적을 정리하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 때 쯤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면 합니다.
* 참고문헌 : 천재과학자들의 바보이야기 이면우 지음. 서울; 아침 1990
우주의 신비를 캔 영웅들 : 인물로 보는 천문학사 이향순 지음. 서울 ; 현암사, 1994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384~322)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철학, 과학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명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최대의 학자로, 고대 과학자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동남쪽에 있는 스타케이로스라는 마을에서 의사인 니코마코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친척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17세가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플라톤이 설립한 아테네의 학술원에 입학하였다.
당시 플라톤 아카데메이아에서는 우주론을 비롯하여 기하학, 물리학, 정치학, 철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플라톤은 우주의 생성과 구조는 물론 공기의 무게론, 소리의 진동 원인설, 전기 현상, 지구의 자전축 등에 대한 이론을 열강하였다. 플라톤은 특히 탈레스를 매우 존경하였으므로, 탈레스에 얽힌 일화를 학생들에게 소개하곤 하였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아 학생들에게는 엄격한 스승이었다.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연구하려면 먼저 철학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20년 동안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방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대화 형식의 질문과 응답, 모순과 역설에 직면함으로서 진리 탐구에 접근하려고 노력하였다.
BC 343년 경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국왕인 필리포스 2세로부터 그의 13세된 아들(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됨)의 가정교사가 되어 줄 것을 요청받고, 알렉산더가 왕위에 오를 때 까지 마케도니아 펠라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국정을 잘 이끌어가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왕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가 돌아간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의 속국이 되어 화려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퇴색이 역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 그가 다녔던 아카데메이아에 대응하는 리케이온을 세웠다. 아카데메이아가 순수 철학과 수학에 관한 연구에 역점을 두었더라면 리케이온은 생물학과 천문학, 역사학에 주안점을 둔 학원이었다. 리케이온의 교육 방법은 특이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생들과 함께 리케이오스 공원을 이리저리 걸으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했다. 긴 가로수가 심어진 조용한 길을 따라 스승과 제자들은 토론하기를 즐겼는데, 그 때문에 학생들은 소요학파(산책학파)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 돌아와서도 알렉산더 대왕의 후원을 받았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존경하였으므로 그는 스승에게 거금 800탈란트를 기부하고, 수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명령권을 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과 식물을 채집하는데 1000여 명의 노예를 동원하였고, 지원금으로 과학을 시대별로 체계적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자연사 박물관을 세우고 각종 동식물의 표본을 수집하였다. 또 그는 천문학, 수학, 의학 등 모든 학문의 기틀을 마련하려는 계획을 세워 과학의 백과전서를 편찬하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발생과 소멸"이라는 저서에서 4원소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그는 4가지 기본 감각으로 따뜻한 것, 찬 것, 습한 것, 건조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것을 두 가지씩 짝을 지어 감수하려 했다. 그는 따뜻한 것과 찬 것, 그리고 습한 것과 건조한 것은 서로 모순이 되어 결합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결국 찬 것과 마른 것의 대응은 흙, 찬 것과 습한 것은 물, 따뜻한 것과 습한 것은 공기. 따뜻한 것과 마른 것은 불에 해당한다고 했다. 지구에 있는 모든 물질은 이들 4요소의 혼합에 의하여 생성된다고 하였고, 이들 요소에는 제각기 자연적 장소가 있어서 그 방향으로 운동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 4원소설로 병의 발생을 설명하였다. 신체는 흙, 불, 공기, 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원소 중에서 어느 하나가 많거나 적거나 차지하고 있어야 할 자리가 바뀌거나 하면 반드시 소동이 일어나게 되며, 그것이 바로 병이라고 했다.
리케이온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자연철학이었다. 그는 수업시간에 우주의 본질을 연구하는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그는 달의 위상 변화에 대하여 알기 쉽고 정확하게 설명하였고, 일식과 월식에 대하여 완전한 답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1년 내내 별자리가 바뀌지 않는 것을 토대로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 주위를 태양과 달 다른 행성들이 돌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눈이 유일한 관찰 도구였던 시대에 그는 별이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천동설은 그의 미완의 걸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실수는 중세 암흑시기를 지날 때 까지 기독교 교리 다음으로 찬양되었다.
BC 323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원정 중 급사하자, 식민지였던 아테네는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고, 평소 아리스토텔레스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반대파는 그를 모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하루 아침에 최고의 지성에서 반역자로 추락하였고, 그는 반대파를 피해 아테네를 빠져나갔다. 그가 피신한 동안 아테네 고등 법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신론을 주장한다는 죄명으로 그가 참석하지 않은 궐석 재판에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테살로니카 북쪽의 칼키스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듬 해에 뜻하지 않는 병으로 망명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수많은 동서고금의 책들을 훑어볼 수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은 높고도 넓었다. 그는 천문학과 역학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지만, 생물학에서는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48종의 동물을 해부하고, 540종의 동물을 형태에 따라 포유류, 파충류, 조류, 양서류, 어류, 갑각류, 절족동물, 연체동물 등으로 분류하였다. 또 인간의 팔과 새의 날개,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같은 계통의 기관이라는 것도 밝혀냈다. 그는 생물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분류 체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대철학자의 저술과 장서 등은 그의 수제자 테오프라스토스의 손에 들어갔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 리테이온을 인계받은 테오프라스토스는 스승이 못다 이룬 생물학에 관한 일을 계속해 식물의 많은 종을 기술하고 분류했다.
테오프라스토스의 뒤를 이어 스트라토가 BC287~BC267년 까지 20여년 동안 리케이온의 총수 자리를 지켰고, 그 이후 리케이온의 명성은 차차 희미해지게 되었다. 대신 새로운 과학 활동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에피쿠로스가 미신 퇴치 운동에 앞장섰고, 아리스타르쿠스가 태양 중심 우주론을 처음으로 제창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선구자로 하여 과학은 역사 속에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릴레이로 달려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테오프라스토스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고, 테오프라스토스는 스트라톤을, 스트라톤은 아리스타르쿠스를 지도하였다. 아리스타르쿠스는 히파르코스를.. 프톨레마이오스를.. 코페르니쿠스를.. 티코를.. 케플러를... 갈릴레오를.. 뉴턴을... 핼리를.. 라플라스를...허셜을.. 로웰을 배출하였고.. 위대한 과학자들의 지도는 아인슈타인을 낳았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과학은 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하며 계승, 발전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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