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관측기기 -우주를 읽어야만 하는 지배자

가두연 기자 승인 2019.10.24 15:35 | 최종 수정 2019.11.29 14:44 의견 0

스페이스타임즈에서는 10월 관측 특집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관측 기기 시리즈를 포스팅 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10월 4일 -  동양의 관측기기
10월 11일 - 태양 관측 망원경
10월 18일 - 망원경 구매가이드 1
10월 25일 - 망원경 구매가이드 2

 

위의 그림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수학서인 주비산경(周髀算經, 저자미상, 후한시대)에 나오는 그림으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내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시겠나요?

그림의 사각형은 삼각형 4개와 안쪽의 작은 블록 1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삼각형 하나의 넓이는 블록 12개의 절반이므로 6입니다. 따라서 사각형의 넓이는 삼각형 4개의 넓이 24에 블록 1개를 더하여 25가 되고, 한 변의 길이는 5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삼각형을 생각해보면 밑변의 길이 3, 높이 4, 빗변 5가 됩니다. 3:4:5,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다.

고대 동양에서는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네모난 땅 위에 원형의 하늘이 있는 형태(천원지방(天圓地方)) 개천설(蓋天說)에 나타나는 천지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를 계산하기 위한 천문학 수학서가 주비산경입니다.

주비산경은 주(周)나라의 비(髀)라는 8척(尺)길이의 막대를 이용한 계산법입니다. 주비(周髀)를 지상에 수직으로 세워 태양의 그림자를 측정하여 해의 높이나 하늘, 땅의 거리를 계산하고, 이것으로부터 밤낮의 변화와 계절의 변화 등 각종 천문현상을 해석하였습니다.

일본의 학자인 노다주료(能田忠亮)는 동양천문학사논총(東洋天文學史論叢, 1943년)에서 주비산경에 기초한 개천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 하늘은 북극(北極)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땅은 정지해있다.
  • 태양은 북극을 중심으로 넓고 평평한 땅에 대하여 횡으로 운행한다.
  • 태양의 빛은 167,000리(里)를 비춘다.
  • 땅은 한 변의 길이가 810,000리인 방형(方形, 각진 형태)이다.
  • 태양의 높이는 80,000리이고, 하늘의 높이 역시 80,000리이다.

위의 해석을 통한 개천설의 천지(天地) 형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땅은 넓고 각진 형태이고 하늘은 그 위에 원형으로 평행하게 있습니다.

하늘과 태양은 북극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태양은 하지(夏至)에는 북극과 가까운 원을 회전하고, 동지(冬至)에는 외각의 원을 회전합니다. 밤이 되는 이유가 재미있는데, 태양이 북극을 중심으로 회전하다 자신(관측자)와 충분히 멀어져 167,000리 이상 떨어지게 되면 태양빛이 더 이상 비추지 못하여 밤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보면 이론적으로 상당히 부실한 것 같지만, 당시에는 개천설에 동조한 학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한의 사상가인 왕충(王充, 27년 ~ 100년,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왕충(王忠)과는 다른 사람입니다.)은 개천설을 기반으로 사상적으로 대립하던 혼천설(渾天設)을 비판하였습니다. 재미있게도 상평통보(常平通寶) 등 옛 화폐에도 이러한 천원지방의 개념이 들어가있습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圜丘壇, 왼쪽)과 땅과 곡식의 신에게 재사지내던 사직단( 社稷壇, 오른쪽)]
[상평통보 당백전,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의 개념이 적용되어 있다. credit: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제는 개천설이 실제로 이론적으로 부실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이러한 부실함은 여러 학자들에게 지적받았습니다. 한(漢)나라의 철학자 환담(桓譚, BC24 ~ AD56), 양웅(揚雄, BC53 ~ AD18)은 다음의 이유를 들어 개천설을 비판하였습니다.

1. 춘추분일에 태양은 정동(正東)에서 뜨고 정서(正西)로 들어가 낮시간은 50각(刻, 시간단위, 하루를 100각으로 나눈 것)이다. 하늘이 개천설에 따라 운행한다면 밤시간은 마땅히 낮시간의 두 배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밤시간 역시 50각이니 왜 그런것인가?

2. 높은 산 위에서 수평(수준기)을 설치하여 태양을 관측하면 태양은 수평 아래쪽에서 뜬다. 만약 하늘이 항상 높고 땅은 항상 아래에 있다면 해가 수평 아래에서 뜰 까닭이 없다. 왜 그런가?

3. 태양이 사라질 때 하늘이 개천설에 따라 운행한다면 그 빛은 마땅히 점차로 서쪽으로 옮겨가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왜 그런것인가?

상당히 통렬한 비판이었습니다. 2번째 문제와 3번째 문제는 “너무 멀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라고 해명할 수 있었지만, 첫 번째 문제만큼은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위의 개천설 개념도를 보며 생각해보시면 큰 문제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채옹(蔡邕,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채옹이 맞습니다.)은 천지의 개념을 설명하며 “주비(周髀, 주비산경을 뜻함)의 술수는 아직 남아있지만 하늘의 형상을 확인하여 살피면 많은 부분이 맞지 않는다.” 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후에 개천설은 하늘과 땅이 가운데가 볼록한 갓 형태, 기울어진 갓 형태 등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변형되지만, 땅 위에 하늘이 있다는 개념은 유지하여 실제 관측치와 오차가 많았습니다.

 

땅은 안에 있고, 하늘은 밖에 있다.

이러한 개천설에 대비되는 우주관이 혼천설(渾天說)입니다. 진서(晉書, 진의 역사서) 천문지(天文志)에는 개천설과 혼천설 이외에 선야설<宣夜說>, 안천론<安天論>, 궁천론<穹天論>, 흔천론<昕天論> 등 총 여섯가지 우주관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선야설은 그 개념이 전해지지 않고(당시에도 전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안천론, 궁천론, 흔천론은 개천설과 혼천설을 변형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남아있는 우주관은 개천설과 혼천설이라고 하겠습니다.

혼천설은 개천설의 “땅은 아래에 있고, 하늘은 위에 있다.” 라는 개념을 부정하였습니다. 혼천설의 개념을 정립한 후한시대의 사상가인 장형(張衡, 78 ~ 139)은 ‘혼천의주(渾天儀注)’이라는 저서에서 혼천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하늘은 달걀과 같고 땅은 마치 달걀의 노른자위 같아서 홀로 하늘안에 놓여있다. 하늘의 가운데를 반으로 나누면 반은 땅 위에 엎어져 있고, 반은 땅 아래를 두르고 있다. 하늘이 도는 것은 마치 수레바퀴의 운행과 같다. 주천(周天, 공전을 뜻함)은 365도4분도지1(356와 1/4도)이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습니다.

땅은 하늘 안에 있고, 구형의 하늘은 평평한 땅을 감싸고 있습니다. (위의 달걀 비유로 땅도 구형태로 생각하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설득력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혼천설도 땅을 평평하다고 가정하여 주비산경의 수학법을 같이 사용하였습니다.)

즉, 개천설과 혼천설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늘이 땅 위에 있느냐, 하늘이 땅을 감싸고 있느냐 의 차이입니다.

혼천설은 지금의 ‘구면천문학’과도 그 원리가 비슷하여 천문현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혼천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천문의기(天文義器, 하늘을 보는 올바른 기구)가 바로 혼천의(渾天儀)입니다.

 

조선시대의 천문의기

[원(元)나라의 혼천의(渾天儀), 혼천설에 따라 천문현상 및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credit:장영실 테마관]
[원(元)나라의 혼천의(渾天儀), 혼천설에 따라 천문현상 및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credit:장영실 테마관]

혼천의가 언제 최초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요임금과 순임금이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이용하여 “칠정(七政, 해와 달, 오행성)을 바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선기옥형이 혼천의와 같거나 비슷한 장치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후한시대 이전에 국가기관에서는 혼천의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위의 채옹은 혼천설을 설명하며 “지금 사관(史官)이 측후대에서 사용하는 청동의 기구가 그것이다. 8척의 둥근 물체는 해와 달의 운행을 따르고 오행성을 쫒는다. 관(官)에는 그 기구가 남아있지만 그에 관한 책은 없고, 이전의 천문지도 빠져 있다.” 라고 하여 이미 관청에서는 혼천의를 사용하였다고 기록였습니다.

혼천의는 혼천설에 따라 하늘의 북극을 기준으로 적도를 표시하고 지금의 적경과 적위의 개념인 거극도(去極度, 북극으로부터의 각도, 적위의 개념)와 입수도(入宿度, 28수의 기준별부터 잰 각도, 적경의 개념)를 이용하여 천체의 위치와 각종 천문현상 등을 관측하였습니다. 

조선에서는 세종 15년(1433년) 6월에 “정초, 박연, 김진 등이 새로 만든 혼천의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혼천의를 더욱 쉽게 개량한 것이 간의(簡儀)라는 천문의기로 혼천의의 적도좌표계 부분과 지평좌표계 부분을 구분하여 더욱 쉽게 관측할 수 있도록 간소화한 것입니다.

[간의(簡儀) 복원품, 혼천의를 간소화한 천문의기, 지평과 수평하게 있는 환은 지평좌표계 관측시, 북극 방향으로 누워있는 환은 적도좌표계 관측시 사용하였다. credit: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간의(簡儀) 복원품, 혼천의를 간소화한 천문의기, 지평과 수평하게 있는 환은 지평좌표계 관측시, 북극 방향으로 누워있는 환은 적도좌표계 관측시 사용하였다. credit: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적도좌표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북극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의에는 정확한 북극을 맞추기 위한 정극환과 후극환이 있습니다. 위 사진의 가장 위의 큰 원이 후극환이고 그 안의 작은 원이 정극환입니다. 북극을 맞추는 방법은 현대 적도의식 마운트의 극축을 정렬하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세종 32년 윤1월 7일 4번째 기사에는 중국사신과 북극고도에 대해서 논하는 내용도 나옵니다.

여기서 8척의 법(八尺之臬) 은 주비산경을 뜻합니다. 여기 나오는 내용은 주비산경의 일촌천리(一寸千里, 하지 때 주비의 그림자 길이가 1촌(寸) 차이나는 지역은 거리상 1,000리의 차이가 있다고 설명) 개념에 의해 중국의 관측을 조선에 적용하면 80,000리의 오차가 발생함을 논한 것입니다. 해시계인 앙부일구에는 “한양북극고삼십칠도이십분(漢陽北極高三十七度二十分)” 라고 북극고도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현재 위도와 조금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이때 각도법은 원 한바퀴에 365.25도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간의의 정극환과 후극환을 이용하여 북극을 맞추는 방법, 운주의 교차점을 함께 사용하여 정확한 극축을 맞추었다]
[간의의 정극환과 후극환을 이용하여 북극을 맞추는 방법, 운주의 교차점을 함께 사용하여 정확한 극축을 맞추었다]

조선만의 독자적인 천문의기도 있습니다. 간의를 더욱 간략화한 소간의(小簡儀)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9년 4월 15일 3번째기사에는 소간의가 옛 제도를 따랐으나 실은 새 법을 이용해 만들었다고 밝힙니다.

[소간의(小簡儀) 복원품, 조선만의 독창적인 천문의기, 간의를 더욱 간략화 하였다. credit:한국문화민족대백과]

소간의는 한 종류의 환을 사용하여 적도좌표계와 지평좌표계를 측정하였습니다. 최근 복원품에는 환이 한꺼번에 두 종류가 끼워져있지만, 실제로는 한 종류의 환을 번갈아 끼워 사용하였습니다.

[소간의 적도좌표계 관측 방법, 한 종류의 환을 사용목적에 맞추어 번갈아 끼워 사용하였다.]

이러한 혼천설을 바탕으로 한 천문의기들은 규표(圭表, 태양의 고도를 재는 관측기기)와 각종 해시계와 함께 정확한 천체관측이 가능토록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BC104년 최초의 역법인 태초력(太初曆, 달력)부터 청조의 시헌력(時憲曆, 현재 음력계산법으로 사용됨)까지 다양한 역법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확한 관측이 가능한 여러 천문의기들 덕분이었습니다. 조선 역시 세종26년(1444년) 독자적인 역법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편찬하여 독자적인 관측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담으로 세종시기 여러 천문의기를 제작하고 이를 경회루 앞에 설치하였습니다. 문제는 필요에 의해서 관측하였지만,(중국관측기록은 위의 세종 32년 윤1월 7일 4번째 기사처럼 조선에 적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역법제작과 천문관측은 중국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일로 당시 사대주의를 표방하던 조선은 중국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천문의기들은 경회루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여러 행사가 이루어지던 경회루는 중국사신의 눈에 띄기 쉬웠을 겁니다.)

조선 세종시기 만들어진 천문의기들은 대부분 소실되었습니다. 천문의기의 사용법 역시 연산군시대에는 대부분 잊혀진 것으로 보입니다. 간의의 경우 기록만으로는 그 형태를 알 수 없어서 90년대 이전에는 혼천의와 비슷한 모양으로 생각되어지다 중국과 수교 후 중국의 간의를 참고하여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원이 잘 못 이루어진 경우도 많습니다. 시기를 아는 것은 농업국가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생사가 걸려있는 일과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우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주 영릉(英陵)의 혼천의 복원품, 안에 지구의 형태가 있고 혼천의 북극 쪽에 톱니나사가 있는 것이 보인다. 이는 실제 관측을 위한 혼천의가 아닌 송이영(宋以潁)의 혼천시계(渾天時計, 국보 제 230호)의 혼천의 부분을 분리한 것으로 정확한 복원이라 보기 어렵다.]

자연의 영향을 많이 받던 과거는 하늘을 읽는 일이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하늘을 관측하고 움직임을 읽는 일들은 지배자들에게는 자기들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필요했을 것입니다.
지금 현대에 와서는 과학의 발달로 움직임은 당연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 우주의 과거를 보는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워낙 어려운 학문이고 영역 세분화 되어 있기 때문에 연구를 하고, 계산을 해내는 것은 이제 학자들이나 전문가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적인 우리는 우주를 바라보면서 즐기고 느끼면 될 것 같습니다.^^;;


과거에 하늘을 바라봤던 방식을 보면서 "아~옛날에는 이렇게 생각했겠구나~" "과거의 하늘은 그랬구나~" 하고 알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린 망원경으로 현재의 하늘을 바라보면 되지 않을까요?

저희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인 "어떤망원경을 사면 될까요?"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다음시간부터 2주에 걸쳐 해볼까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별을 볼 준비를 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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