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천의가 언제 최초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요임금과 순임금이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이용하여 “칠정(七政, 해와 달, 오행성)을 바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선기옥형이 혼천의와 같거나 비슷한 장치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후한시대 이전에 국가기관에서는 혼천의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위의 채옹은 혼천설을 설명하며 “지금 사관(史官)이 측후대에서 사용하는 청동의 기구가 그것이다. 8척의 둥근 물체는 해와 달의 운행을 따르고 오행성을 쫒는다. 관(官)에는 그 기구가 남아있지만 그에 관한 책은 없고, 이전의 천문지도 빠져 있다.” 라고 하여 이미 관청에서는 혼천의를 사용하였다고 기록였습니다.
혼천의는 혼천설에 따라 하늘의 북극을 기준으로 적도를 표시하고 지금의 적경과 적위의 개념인 거극도(去極度, 북극으로부터의 각도, 적위의 개념)와 입수도(入宿度, 28수의 기준별부터 잰 각도, 적경의 개념)를 이용하여 천체의 위치와 각종 천문현상 등을 관측하였습니다.
조선에서는 세종 15년(1433년) 6월에 “정초, 박연, 김진 등이 새로 만든 혼천의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혼천의를 더욱 쉽게 개량한 것이 간의(簡儀)라는 천문의기로 혼천의의 적도좌표계 부분과 지평좌표계 부분을 구분하여 더욱 쉽게 관측할 수 있도록 간소화한 것입니다.
적도좌표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북극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의에는 정확한 북극을 맞추기 위한 정극환과 후극환이 있습니다. 위 사진의 가장 위의 큰 원이 후극환이고 그 안의 작은 원이 정극환입니다. 북극을 맞추는 방법은 현대 적도의식 마운트의 극축을 정렬하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세종 32년 윤1월 7일 4번째 기사에는 중국사신과 북극고도에 대해서 논하는 내용도 나옵니다.
여기서 8척의 법(八尺之臬) 은 주비산경을 뜻합니다. 여기 나오는 내용은 주비산경의 일촌천리(一寸千里, 하지 때 주비의 그림자 길이가 1촌(寸) 차이나는 지역은 거리상 1,000리의 차이가 있다고 설명) 개념에 의해 중국의 관측을 조선에 적용하면 80,000리의 오차가 발생함을 논한 것입니다. 해시계인 앙부일구에는 “한양북극고삼십칠도이십분(漢陽北極高三十七度二十分)” 라고 북극고도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현재 위도와 조금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이때 각도법은 원 한바퀴에 365.25도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